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는 독일의 은퇴한 프로 축구 선수이다. 그는 주로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했으며, 강력한 슈팅, 뛰어난 크로스, 세트피스 능력,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바이에른 뮌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카고 파이어 등에서 뛰었다. 슈바인슈타이거는 분데스리가, DFB-포칼, UEFA 챔피언스리그 등 수많은 클럽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독일 국가대표팀으로 2014년 FIFA 월드컵 우승, UEFA 유로 2008 준우승을 경험했다. 그는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2016년 UEFA 유로를 끝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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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는 FC 바이에른 뮌헨 유소년 팀 출신으로 2002년 1군 무대에 데뷔했다. 초기에는 주로 윙어로 뛰었으나[11] 점차 중앙 미드필더로 자리를 잡으며 팀의 핵심 선수로 성장했다. 특히 루이스 판 할 감독 아래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완전히 정착한 후 세계적인 선수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17년간 활약하며 분데스리가 8회, DFB-포칼 7회, UEFA 챔피언스리그 1회 우승 등 수많은 영광을 함께했으며, 2012-13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첫 트레블 달성의 주역이었다.
2015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158][15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첫 독일인 1군 선수였으나,[162] 잦은 부상[165][166]과 조제 모리뉴 감독 부임 이후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는 등[167] 어려움을 겪었다.
2017년 미국 메이저 리그 사커의 시카고 파이어로 이적하여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냈고, 2019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2. 1. 바이에른 뮌헨
2013년 바이에른 뮌헨에서 훈련 중인 슈바인슈타이거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는 1998년 바이에른 뮌헨 유소년팀에 입단하여[2][141] 성장했으며, 재능 있는 스키 유망주이기도 했으나 축구를 선택했다.[7][146] 2002년 독일 유소년 선수권 우승 후 2군을 거쳐[8] 같은 해 11월, 18세의 나이로 UEFA 챔피언스리그 RC 랑스 전에서 1군 데뷔전을 치렀다.[7][146] 데뷔 시즌인 2002-03 시즌에는 주로 왼쪽 윙어 또는 풀백으로 뛰며 리그 14경기에 출전해 팀의 더블 우승에 기여했다.[11] 초기에는 메흐메트 숄, 하산 살리하미지치 등의 백업 역할을 했으나 점차 출전 시간을 늘려갔다.
2007-08 시즌 프랭크 리베리의 합류로 오른쪽 윙어로 포지션을 변경하기도 했으나, 윙어로서의 평가는 스피드가 부족하고 기복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2008년 여름 이적설에도 불구하고 팀과 재계약을 체결했다.[13]
2009-10 시즌, 루이스 판 할 감독의 권유로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한 것은 그의 커리어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패스와 중거리 슛 능력을 바탕으로 중앙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마르크 판 보멀과 함께 팀의 중원을 책임졌고, 키커지로부터 '월드클래스' 평가를 받았다. 이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달성했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준우승을 기록했다.
이후 슈바인슈타이거는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2010-11 시즌에는 팀이 다소 부진했지만, 그는 꾸준한 활약을 보였고 2016년까지 계약을 연장하며 팀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다.[14] 2011-12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으나, 팀을 결승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5]
2012-13 시즌은 슈바인슈타이거의 커리어 정점으로, 하비 마르티네스와 강력한 중원을 구축하며 공수 양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전에서 기록한 백힐 결승골은 시즌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16] 이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 DFB-포칼, UEFA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제패하며 독일 클럽 역사상 최초의 트레블을 달성했고, 슈바인슈타이거는 그 중심에 있었다. 이러한 활약으로 2013년 독일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17][131] 당시 감독 유프 하인케스는 그를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18]
주제프 과르디올라 감독 부임 이후에도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으나, 잦은 부상으로 인해 출전 시간이 이전보다 줄어들었다. 특히 2013-14 시즌과 2014-15 시즌에는 발목 및 무릎 부상으로 인해 여러 차례 결장했다.[21][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전했을 때는 꾸준한 경기력을 보여주었으며, 2014-15 시즌에는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통산 500번째 경기에 출전하여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25]
슈바인슈타이거는 17년 동안 바이에른 뮌헨에서 활약하며 8번의 분데스리가 우승, 7번의 DFB-포칼 우승, 1번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팬들로부터 "Fußballgott"(축구의 신)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28] 큰 사랑을 받았다.
2014-15 시즌 종료 후,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2015년 7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며 17년간 몸담았던 바이에른 뮌헨을 떠났다.[26][27] 그의 이적 소식에 많은 뮌헨 팬들은 팀의 레전드를 쉽게 떠나보낸 구단에 아쉬움과 반발을 표하기도 했다.
1998년 7월 1일, 바이에른 뮌헨 유소년팀에 입단했다.[2][141] 재능 있는 유소년 스키 선수이기도 했으나, 스키 대신 축구 선수로서의 길을 선택했다.[7][146] 2002년 7월 독일 유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후, 곧바로 2군 팀에 합류하여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8] 초기에는 경기장 밖에서의 반항적인 이미지로 주목받기도 했지만, 점차 안정된 모습을 찾아갔다.[9][147]
2002년 11월 13일, 1군 훈련을 단 두 번 소화한 뒤 당시 감독 오트마어 히츠펠트에 의해 RC 랑스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메멧 숄과 교체 투입되며 18세의 나이로 1군 무대에 데뷔했다.[7][146] 그는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스 포일너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10] 다음 달 프로 계약을 체결했고, 2002-03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14경기에 출전하며 바이에른의 리그와 컵 더블 우승에 기여했다. 주로 왼쪽 윙어로 뛰었으며, 데뷔 초기에는 메흐메트 숄과 하산 살리하미지치의 백업 역할을 수행했다.
2003-04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26경기에 출전했고,[11] 2003년 9월 13일 VfL 볼프스부르크와의 경기에서 바이에른 소속 첫 골을 기록했다. 2004-05 시즌 초, 새로운 감독 펠릭스 마가트에 의해 잠시 2군으로 내려가기도 했으나,[12] 곧바로 1군에 복귀하여 팀의 더블 우승에 기여했다. 또한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첼시와의 원정 경기에서 자신의 첫 챔피언스리그 골을 기록했다.
이후 점차 주전 자리를 확보해나갔다. 2007-08 시즌까지 세 시즌 동안 슈바인슈타이거는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모든 대회를 통틀어 135경기에 출전하여 10골을 기록했다. 2007-08 시즌을 앞두고 프랭크 리베리가 팀에 합류하자, 주 포지션을 오른쪽 윙어로 옮겨야 했다.
UEFA 유로 2008에서의 활약 이후 2008년 여름,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인테르나치오날레 등 빅클럽들의 관심을 받으며 이적설이 불거졌다. 하지만 소속팀 바이에른 뮌헨의 계속된 구애 끝에 3년 재계약을 체결하며 2012년 6월까지 팀에 남게 되었다.[13]
2008년 8월 15일, 2008-09 시즌 분데스리가 첫 골을 넣었다. 이 시즌 9골 1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개인 통산 최다 공격포인트를 달성했지만, 경기력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볼을 쉽게 빼앗기는 경향이 있었고, 경기력의 기복이 심했으며, 일반적인 윙어들에 비해 스피드가 부족하다는 단점을 꾸준히 지적받았다.
2012년 4월 25일 레알 마드리드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마지막 키커로 나서 성공하며 팀의 결승 진출을 확정지었다.[146] 하지만 바이에른의 홈구장인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열린 첼시와의 결승전에서는 1-1 무승부 후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슈바인슈타이거의 슛이 골키퍼의 손끝에 걸린 뒤 오른쪽 골포스트를 맞고 빗나가면서, 팀은 첼시에 패배했다.
2. 1. 5. 2012-13 시즌
2012-13 시즌에는 새롭게 합류한 하비 마르티네스와 중원에서 호흡을 맞추었다.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전에서는 백힐 슈팅으로 결승골을 넣는 등[149]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슈바인슈타이거에게는 커리어 최고의 시즌으로 평가받으며, 분데스리가, DFB 포칼, UEFA 챔피언스리그 트레블 달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슈바인슈타이거는 2013년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150][151] 당시 감독이었던 유프 하인케스는 그를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라고 칭찬하기도 했다.[152]
다만 2012-13 시즌 DFB-포칼 결승에서 발목 부상을 당해 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이 부상은 다음 시즌 초반 컨디션 조절에 영향을 미쳤다.
2. 1. 6. 2013-14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CSKA 모스크바와의 홈경기에서는 한 경기에서 156회의 볼터치를 기록했고, 3회의 킬패스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팀은 4대 0으로 승리했으며, 슈바인슈타이거의 156회 볼터치는 역대 UEFA 챔피언스리그 단일 경기 최다 볼터치 횟수로 기록되었다.
2014-15 시즌은 슈바인슈타이거가 17년간 활약했던 바이에른 뮌헨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2015년 5월 23일, 1. FSV 마인츠 05와의 분데스리가 경기는 그가 바이에른 뮌헨 유니폼을 입고 뛴 마지막 공식 경기가 되었다.[155] 이 경기를 통해 슈바인슈타이거는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공식전 통산 500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으며,[156] 분데스리가 통산 45번째 골을 기록했다.[157] 시즌이 끝난 후인 2015년 7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의 이적이 확정되었다.[154]
2. 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2015년 7월 12일(한국시각), 13년간 바이에른 뮌헨에서 활약한 슈바인슈타이거의 영입을 공식 발표하며 중원을 보강했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구단 역사상 첫 독일 출신 선수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8일, 토트넘과의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에서 마이클 캐릭과 교체 투입되어 데뷔전을 치렀다. 11월 29일(한국시각) 레스터 시티와의 원정 경기에서는 EPL 데뷔골을 기록했고, 팀은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이 골은 맨유 소속 독일 선수가 기록한 첫 골이었다. 활약을 인정받아 맨유 팬들로부터 55%의 지지를 얻어 11월의 맨유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5일 웨스트햄과의 홈 경기 중 윈스턴 리드에게 팔꿈치를 사용한 행위가 영상 판독 결과 드러나 FA로부터 3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후 2016년 1월 31일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FA컵 경기에서는 무릎 부상을 당해 약 2개월간 결장했다. 부상에서 복귀하여 출전 시간을 늘려가던 중, 국가대표팀 훈련 도중 다시 무릎 부상을 입어 남은 시즌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시즌 아웃되었다.
2016-17 시즌을 앞두고 무리뉴 감독이 부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2016년 8월 2일(한국시간), 슈바인슈타이거는 1군 훈련에서 제외되었고, 2군으로 내려가라는 지시와 함께 1군 라커룸 사용도 금지당했다. 9월 2일(한국시각) 발표된 리그 선수 명단에는 포함되었으나, 9월 4일(한국시각) 유로파리그 27인 명단에서는 제외되었다.
한동안 2군에서 훈련하던 슈바인슈타이거는 팀 성적이 부진하자 무리뉴 감독의 결정으로 1군 훈련에 복귀했다. 2016년 12월 1일(한국시각) 웨스트햄과의 EFL 컵 8강전에서 후반 41분 교체 출전하며 해당 시즌 첫 경기를 소화했다. 맨유는 이 경기에서 4-1로 승리하며 4강에 진출했다. 2017년 1월 30일(한국시간)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린 위건과의 FA컵 4라운드(32강) 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1골 1도움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고, 팀의 4-0 승리에 기여했다. 경기 후 영국 통계 사이트 후스코어드닷컴으로부터 양 팀 최고 평점인 8.9점을 받았다. 2017년 2월 4일(한국시간)에는 유로파리그 명단에도 추가되었다.
하지만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 해당 시즌 총 4경기 출전에 그쳤으며, 결국 2017년 3월 21일(한국시각) 미국 메이저 리그 사커의 시카고 파이어로 이적하게 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2017년 3월 21일, 슈바인슈타이거가 메디컬 테스트와 비자 발급을 조건으로 시카고 파이어에 합류하는 것을 허락했다.[43][44][45] 이적은 3월 29일에 최종 완료되었다.[46] 며칠 후, 무리뉴 감독은 슈바인슈타이거를 대했던 자신의 방식에 대해 "후회한다"고 언급했다.[47]
2. 3. 시카고 파이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주전 경쟁에 밀려 2016-17 시즌 4경기 출전에 그친 슈바인슈타이거는 결국 2017년 3월 21일(한국시각) 미국 메이저 리그 사커의 시카고 파이어로 이적하였다.
2017년 시카고 파이어에서 뛰는 슈바인슈타이거
2017년 3월 21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슈바인슈타이거가 메디컬 테스트와 비자 발급을 조건으로 메이저 리그 사커의 시카고 파이어에 합류하는 것을 허락했다.[43][44][45] 이적은 3월 29일에 완료되었다.[46] 며칠 후, 무리뉴 감독은 슈바인슈타이거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후회한다"고 말했다.[47] 4월 1일, 슈바인슈타이거는 시카고 파이어 데뷔전을 치렀고, 몬트리올 임팩트와의 홈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득점을 올렸다.[48] 시즌 중반, 그는 시카고가 MLS 순위 최상위권에 오르도록 이끌었고, 팀 동료인 네마냐 니콜리치와 함께 시카고에서 열린 2017 MLS 올스타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 출전할 "MLS 올스타 팬 XI"에 선정되었다.[49] 5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끈 슈바인슈타이거는 2018년 1년 계약 연장 옵션을 받았다.[50]
2018년 4월 29일, 슈바인슈타이거는 토론토 FC와의 경기에서 경기 종료 직전 앨런 고든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고 직접 득점을 올리며 2-2 무승부를 만들었다.[51] 8월 5일, 그는 후반전 교체 투입 후 장거리 슛으로 동점골을 넣었지만, 리얼 솔트 레이크와의 원정 경기에서 2-1로 패했다.[52][53] 7월 11일, 슈바인슈타이거는 필라델피아 유니온과의 홈 경기에서 경기 종료 직전 득점을 기록하고 알렉산다르 카타이의 골을 어시스트했지만, 팀은 4-3으로 패했다.[54]
필립 람의 국가대표 은퇴 후인 2014년 9월, 슈바인슈타이거는 독일 대표팀의 새로운 주장으로 임명되었다.[68] 그는 주장으로서 UEFA 유로 2016까지 팀을 이끌었다.
UEFA 유로 2016을 끝으로 슈바인슈타이거는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72] 그의 마지막 A매치 경기는 2016년 8월 31일에 열린 핀란드와의 친선 경기였다.[73] 그는 총 121번의 A매치에 출전하여 24골을 기록했다.[192]
주로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했지만, 필요에 따라 측면 미드필더 역할도 소화할 수 있었다. 뛰어난 킥 정확도, 장거리 슈팅 능력,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경기의 흐름을 조율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중원의 엔진',[184] '두뇌',[185] '지휘자'[186] 등으로 불렸다.
'''연도별 국가대표 출장 기록'''[192]
연도
출장
득점
2004
10
0
2005
13
4
2006
18
9
2007
6
0
2008
15
4
2009
10
2
2010
12
2
2011
6
2
2012
7
0
2013
3
0
2014
8
0
2015
6
0
2016
7
1
합계
121
24
3. 1. 2006년 FIFA 독일 월드컵
자국에서 열린 2006년 FIFA 월드컵에 출전했다. 조별예선에서는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2골과 토르스텐 프링스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토너먼트 단계에서는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이탈리아와의 4강전에서는 교체로 출전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맞붙었던 3,4위전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당시 21세였던 슈바인슈타이거는 홀로 드리블 돌파 후 환상적인 중거리 슈팅으로 두 골을 기록했으며, 그의 프리킥이 굴절되어 프티의 자책골로 연결되기도 했다.[62][7] 슈바인슈타이거는 이 경기에서 거의 해트트릭에 가까운 활약을 펼치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고,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62]
3. 2. UEFA 유로 2008
유로 2008 예선에서 슈바인슈타이거는 산마리노를 상대로 13-0 대승을 거두는 과정에서 두 골을 넣었고,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린 슬로바키아와의 원정 경기에서도 독일의 4-1 승리에 기여하는 골을 기록했다.
본선 대회 초반에는 클레멘스 프리츠에게 밀려 백업으로 시작했다. 요아힘 뢰프 감독이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마리오 고메스의 투톱 조합을 활용하기 위해 슈바인슈타이거의 주 포지션인 왼쪽 윙 자리에 루카스 포돌스키를 배치했기 때문이다. 조별리그 첫 경기인 폴란드전에서는 후반 교체 투입되어 상대 수비에 대한 집요한 견제로 루카스 포돌스키의 추가골을 만들어내는 등 좋은 활약을 펼치며 다시 주전 자리를 확보하는 듯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경기 종료 직전 예르코 레코와의 신경전 과정에서 불필요한 행동으로 퇴장을 당했고, 독일은 이 경기에서 1-2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퇴장으로 인해 슈바인슈타이거는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오스트리아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독일은 이 경기에서 미하엘 발라크의 프리킥 결승골로 간신히 1-0 승리를 거두고 8강에 진출했다.
징계에서 돌아온 슈바인슈타이거는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 선발 출전했다. 마리오 고메스가 부진하여 벤치로 물러나고 요아힘 뢰프 감독이 기존의 4-4-2 포메이션으로 복귀하면서 기회를 얻었다. 그는 이 경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루카스 포돌스키의 땅볼 크로스를 반대편에서 중앙으로 빠르게 파고들며 선제골을 기록했고, 후반전에는 두 번의 세트피스 찬스에서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미하엘 발라크의 헤딩골을 모두 어시스트하며 1골 2도움의 맹활약을 펼쳤다. 독일은 3-2로 승리했고, 슈바인슈타이거는 2006년 FIFA 월드컵 3·4위전에 이어 또다시 포르투갈을 상대로 경기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다.
터키와의 4강전에서는 독일이 상대의 끈질긴 압박에 고전하며 위구르 보랄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실점 4분 만에 루카스 포돌스키의 패스를 받아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독일은 결국 접전 끝에 3-2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스페인과의 결승전에서는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호안 카프데빌라, 마르코스 세냐 등을 상대로 왕성한 활동량을 보이며 분전했으나, 팀은 페르난도 토레스에게 전반전에 내준 선제 결승골을 만회하지 못하고 0-1로 패배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3. 3. 2010년 FIFA 남아공 월드컵
2010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 슈바인슈타이거는 10경기 중 9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기록하며 독일의 본선 진출에 기여했다. 본선 직전인 2010년 6월 3일, 보스니아와의 평가전에서는 페널티킥으로만 2골을 넣어 팀의 3-1 승리를 도왔다.
2010년 FIFA 월드컵 본선에서는 주장이었던 미하엘 발락이 부상으로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자, 슈바인슈타이거가 그의 자리를 대신해 중앙 미드필더로서 팀의 중원을 책임졌다. 그는 이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 된 독일 대표팀에 경험과 리더십을 더해주었다.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 활약이 뛰어났다.
독일은 토너먼트에서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였다. 잉글랜드와의 16강전에서는 역습 상황에서 빠른 드리블 돌파로 토마스 뮐러의 골을 도왔다.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에서는 전반 3분 만에 세트피스에서 날카로운 크로스로 토마스 뮐러의 선제 헤딩골을 어시스트했고, 후반에는 오른쪽 측면에서 니콜라스 오타멘디, 하비에르 파스토레, 곤살로 이과인을 연달아 제치는 드리블 돌파 후 아르네 프리드리히의 추가골까지 어시스트했다. 이 경기에서 리오넬 메시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등 공수 양면에서 활약한 슈바인슈타이거는 FIFA가 선정한 경기 최우수 선수(Man of the Match)가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4강전에서는 세르히오 부스케츠와 사비 알론소를 상대로 중원에서 분투했지만, 제라르 피케 등 스페인 수비진에 막혀 공격 활로를 열지 못하고 고전했다. 결국 카를레스 푸욜에게 헤딩 결승골을 내주며 독일은 0-1로 패배하여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우루과이와의 3·4위전에서는 필립 람이 질병으로 결장하자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섰다. 경기 초반 강력한 중거리 슈팅이 골키퍼 선방 후 토마스 뮐러의 골로 연결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고, 독일은 3-2로 승리하며 2006년 FIFA 월드컵에 이어 다시 한번 3위를 차지했다.
슈바인슈타이거는 이 대회에서 총 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디르크 카윗, 카카, 토마스 뮐러, 메수트 외질과 함께 대회 최다 도움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63]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FIFA가 선정한 2010 남아공 월드컵 드림팀(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렸고, 대회 최우수 선수에게 주어지는 FIFA 골든볼 최종 후보 10인에도 포함되었다.[64]
3. 4. UEFA 유로 2012
슈바인슈타이거는 예선 조별리그에서 독일 대표팀의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그는 벨기에,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오스트리아, 터키와의 경기를 포함해 총 5경기에 출전하며 독일이 10전 전승으로 본선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고, 이 과정에서 1골과 1도움을 기록했다.
UEFA 유로 2012 본선에서는 이전 부상의 여파로 폼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 공격적인 활약은 다소 미미했다. 대회 전체에서 가장 많은 볼 터치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위협적인 장면을 많이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수비적인 기여도는 뛰어났다. 특히 조별 예선 1차전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는 상대 에이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며 팀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조별 예선 2차전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는 날카로운 패스로 마리오 고메스의 두 골을 모두 어시스트하며 2-1 승리를 이끌었다. 슈바인슈타이거는 본선 5경기에 모두 선발 출전했지만, 독일은 4강에서 이탈리아에 1-2로 패배하며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3. 5. 2014년 FIFA 월드컵
독일의 2014 FIFA 월드컵 예선 통과 과정에서 5경기에 출전했다. 2013년 10월 15일, 스웨덴과의 예선 경기에서 5-3 승리를 거두며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100번째 경기 출전 기록을 달성했다.[65]
본선 대회 초반에는 뢰프 감독이 필리프 람을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했고, 슈바인슈타이거 자신도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주로 교체 선수로 경기에 나섰다. 그러나 가나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 교체 투입되어 좋은 활약을 펼치자, 토니 크로스와 람으로 구성된 기존 중원의 공격 전개가 다소 답답하다는 평가 속에서 슈테판 에펜베르크, 올리버 칸 등 독일 축구계의 전설적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의 선발 출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조별리그 3차전 미국과의 경기부터 결승전까지 모든 경기에 선발로 출전하게 되었다.[66]
16강전부터 결승전까지 슈바인슈타이거는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팀의 수비 라인을 보호하고 공격 방향으로 볼을 배급하는 역할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무스타피의 부상으로 람이 다시 풀백 자리로 돌아가자, 슈바인슈타이거는 사미 케디라와 함께 중원을 책임지며 독일의 연승 행진에 크게 기여했다. 독일은 16강전에서 까다로운 상대인 알제리(2-1 승리)를 시작으로 프랑스를 차례로 꺾었고, 4강에서는 개최국 브라질을 상대로 7-1이라는 믿기 힘든 점수 차로 대승을 거두며 12년 만에 월드컵 결승 무대에 올랐다.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슈바인슈타이거는 양 팀 선수 중 가장 많은 15.3km를 뛰는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주며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리오넬 메시, 곤살로 이과인 등이 포진한 아르헨티나의 중원에 맞섰다. 그는 중원을 효과적으로 장악하며 독일 공격수들에게 넓은 공간으로 패스를 공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연장전에서는 상대 공격수 세르히오 아궤로의 팔꿈치에 얼굴을 가격당해 눈 밑이 찢어져 피를 흘리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응급 치료 후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와 끝까지 뛰는 투혼을 발휘했다. 독일은 연장 후반 113분에 터진 마리오 괴체의 천금 같은 결승골을 잘 지켜내며 1-0으로 승리, 통산 네 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67]
슈바인슈타이거가 2014 FIFA 월드컵 결승전 우승 후 월드컵 트로피와 함께 기뻐하고 있다.
FIFA가 공식 선정한 경기 최우수 선수(Man of the Match)는 결승골의 주인공인 마리오 괴체였으나, 영국의 Sky Sports를 비롯한 다수의 유력 언론 매체들은 슈바인슈타이거를 결승전 최고의 선수로 선정하며 그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다.
3. 6. UEFA 유로 2016
필립 람의 국가대표 은퇴 후, 슈바인슈타이거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로운 주장으로 임명되었다.[68]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었으나, 예선 과정에서 폴란드에게 0-2로 패배하고 아일랜드에게 0-1로 패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폴란드에게 패한 것은 독일 축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16년 3월 23일, 국가대표팀 훈련 중 무릎 부상을 당해 프리미어리그 시즌 잔여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UEFA 유로 2016 본선을 앞두고 회복하여 독일 대표팀 27인 예비 명단에 포함되었다.[68] 이후 5월 31일 최종 23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 시기 독일축구협회와 레고 그룹의 협력으로 유럽 한정판 수집용 미니피겨 시리즈가 출시되었는데, 슈바인슈타이거는 16명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다.[69]
본선에서는 2016년 6월 12일, 우크라이나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후반 막판 교체 투입되어 추가시간에 골을 넣어 팀의 2-0 승리에 기여했다.[70] 6월 21일에는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 최다 출전 기록을 세웠다.[71] 독일은 조별리그에서 폴란드와 비기는 등 고전했지만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 슬로바키아를 꺾고 8강에 올랐으며, 8강에서는 이탈리아를 만나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6-5로 승리했다. 이 승부차기에서 슈바인슈타이거는 실축하기도 했다. 4강에서는 개최국 프랑스를 만나 패배하며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슈바인슈타이거는 UEFA 유로 2016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72] 그의 A매치 기록은 120경기 출전, 24골이다. 한 달 뒤 보루시아 파르크에서 열린 핀란드와의 친선 경기가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가 되었다.[73] 그의 주장직은 마누엘 노이어가 이어받았다.[74]
4. 플레이 스타일
주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이지만 좌우 윙어로도 뛸 수 있는 다재다능함을 갖췄다. 바이에른 뮌헨 시절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75][76][183]
강력한 피지컬과 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각력이 매우 좋아 먼 거리에서도 위력적인 슈팅을 구사할 수 있었고, 뛰어난 크로스 능력과 위협적인 세트피스 처리 능력을 갖췄다.[75][76][183] 넘치는 활동량 또한 그의 강점이었다.[75][76][183] 우아한 플레이를 펼치면서도 좋은 테크닉, 기술, 패스 능력, 시야, 창의성을 갖추고 있어 미드필드에서 팀 경기의 흐름을 조절하고 지휘하며 공격을 전개하고 동료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능력으로 유명했다.[77][78][79][81][82][83][84] 이러한 능력 덕분에 "미드필드의 엔진"이라고 불렸으며,[85][184] 뛰어난 경기 판단력과 좋은 위치 선정을 통해 중요한 골을 넣기도 했다.[86] 공격적인 능력 외에도 수비 능력, 활동량, 태클 능력 또한 뛰어났다.[87]
이러한 다재다능함 덕분에 닉 에미스는 그를 "양방향 선수"라고 묘사했으며,[77] 수비형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플레이메이커,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등 다양한 미드필더 역할을 수행했다.[77][78][79][81][80] 조너선 윌슨은 2013년 《가디언》 기고문에서 슈바인슈타이거를 볼을 직접 몰고 전진하거나 돌파할 수 있는 유형의 수비형 미드필더("캐리어" 또는 "서저")로 분류하기도 했다.[89]시카고 파이어 시절에는 미드필더 외에도 그의 시야와 수비 능력 덕분에 3백의 중앙 수비수나 스위퍼로 기용되기도 했는데, 이 위치에서 상대 선수 마크와 같은 수비적 임무뿐만 아니라 볼을 빼앗아 점유율을 유지하고 미드필드로 전진하며 경기를 조절하는 공격적인 역할까지 맡았다.[90][91][92]
다만 강력한 슈팅 능력에 비해 골 정확도는 다소 낮은 편이라는 평가도 있으며, 2011-12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첼시 FC를 상대로 한 승부차기에서 실축하여 팀이 우승을 놓치는 데 영향을 주었고, UEFA 유로 2016 8강전 이탈리아와의 승부차기에서도 실축한 바 있다.
요아힘 뢰프 감독은 그를 독일 대표팀의 "두뇌"라고 칭찬했으며,[86][185] "미드필드의 마스터마인드",[88] "중원의 지휘자"[186]로도 불렸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2013년 독일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88][186] 그의 전 시카고 파이어 감독 벨코 파우노비치는 2019년 그의 은퇴 당시 그를 "독특하고 특별한 선수", "완벽한 선수"라고 평가하며 독일에서 불리는 별명인 'Fussballgott|푸스발고트de'(축구의 신)를 언급하기도 했다.[93]
주로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하지만, 측면 미드필더도 소화할 수 있다.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세트피스에서 높은 정확도의 킥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장거리 슈팅에도 능하며, 풍부한 활동량을 가지고 있다.[183] 경기의 템포를 조절하는 "중원의 엔진"이며,[184] 경기 흐름을 읽는 능력에도 뛰어나, 좋은 위치 선정으로 많은 골을 기록했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요아힘 뢰프 (Joachim Löw)는 그를 독일 대표팀의 "두뇌"라고 칭찬했으며,[185] 2013년 투표를 통해 독일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을 때는 "중원의 지휘자"로 칭송받았다.[186]
그의 성 '슈바인슈타이거'의 유래가 '슈바인'(돼지)과 '슈타이거'의 조합일 것으로 외국에서 종종 오해하고 있으나, 독일에서는 바이에른 주의 지역 이름인 '슈바인슈타이그'에 그 지역 출신임을 나타내는 접미사 '-er'가 붙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
형 토비아스는 현재 FC 바이에른 뮌헨 U-17의 축구 코치이다.
대인관계는 원만하지 않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이외의 축구선수들과 마찰을 빚어왔다. 막시 로드리게스, 마르코 마테라치, 리오넬 메시 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UEFA 챔피언스리그 2011-12 당시 FC 바이에른 뮌헨은 첼시 FC와 결승전을 치렀는데, 승부가 나지 않아 승부차기에 들어갔다.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이 승부차기에서 실축했고, 이어진 디디에 드로그바의 성공으로 첼시가 우승하며 바이에른 뮌헨은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날 결승전이 벌어졌던 알리안츠 아레나 경기장에는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이 FC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을 격려하려고 이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아르연 로번 등 다른 국적 선수들을 포함한 동료 선수들은 가우크 대통령과 악수했지만, 정작 독일 국적인 슈바인슈타이거는 악수를 거부했다. 훗날 슈바인슈타이거는 팀 패배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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